restoring our biblical and constitutional foundations

                

The Purpose of a Seminary (Korean)

 David Alan Black  

신학교의 목적 

저는 진심으로 가르치는 것을 즐기는데, 특별히 하나님께서 저에게 허락해 주신 귀한 학생들과 교제하며 제 삶을 나눌 때 그 기쁨이 더욱더 큽니다. 또한, 교수로써 학생들에게 선교의 마음을 품게 하는 것이 저의 사명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데요. 사실, 되돌아보면 이것이 저의 가장 큰 목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신학교란 학생들이 교수들로부터 학적인 면뿐만 아니라 교회사역의 전반에 걸쳐서 두루 배우고 영향력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 삶의 전 영역에 걸쳐서 헌신하고 고백하는 것이 모든 강의의 핵심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골로새서 2:6) 또한 학생들로 하여금 읽어버린 영혼에 대한 구령의 열정을 가지며 이들을 향한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 아울러서 중요하게 행해져야 하는 신학교의 가르침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의 훌륭한 복음적인 신학교들(Wiedenest, Brake, Bad Liebenzell)은 의도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선교적인 사명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에 이러한 독일의 학교들은 국가에서 인정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학적인 위신”(Credibility)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국가적인 위신은 불필요한 것이며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 됩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인정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의 신학교들이 세계선교에 초점을 맞추게 될 때 비로서 교회갱신의 골격과 활력을

제공할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믿기로는 이러한 선교에 중점을

두는 교회갱신이야말로 교회적으로 많은 성도들이 더욱더 헌신된 마음으로 바뀌어지는 평신도

사역자들을 이끌어내는 중심축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교회가 선교중심적으로

변화되고 이러한 가운데 평신도들의 끊임없는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신학교들은

당연히 선교사들을 양성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신학교내의

가르침과 복음적인 연구들은 현재 선교사들이 당면하고 있는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신학들을 대변하는 통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건물들 또한 선교적인

센터가 되어서 교수들이 직접 헌신된 신자들을 양육하고 사역하는 일에 직접적으로 연계가 되

어지며 이와 같은 이들의 사역들을 통해서 학생들이 배울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교회성도들과 신학교의 공동체가 동시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 또한 하나의 조직에 충실한 사람들이 돼

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지상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하게 되며 더 나아가서 지역교회들이 공동체와 선교에 대한 정체성을 재확립하면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할 때 성도들은 더 이상 세속적이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물들여져 질 것입니다. 교회들 또한 세속적인 것에 물들여지는 것에 초점을 기울이는 것에서부터 벗어나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중점을 두고 사역을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역이 시작되려면 교회는 먼저 복음의 손길을 저해하려는 집단들과 무가치한 은혜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 흥미를 가지는 것들을 철저하게 없애 버리고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고 치유하며 그리스도를 전 세계에 증거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으로

철저하게 변화 되고 준비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분들은 신학교가 선교에 대한 어떠한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 신학교의 목적이 선교에 중점적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신학을 연구하고 공부하게 되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이러한 생각은 복음의 능력에 제한을

두는 것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이를 통해서 기독교가 점점 제한적으로 약해져 가는 근본

원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에 근거한 명령을 우리들의 중심가치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게 될 때에 우리는 이 본질적인 것에 대한 중심가치를 높이던지

아니면 부적절 상태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갈래에 놓여질 수 밖에 없습니다.

후자의 경우 신학교 교수들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써의 의무를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명령이 우리의 첫 번째 우선순위가 되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경적인 기독교인으로써의 삶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자신의 모든 시간을 할애해서 학적인 필요성을 채우는 신학자들을 지탄하려는 뜻은

없습니다. 다만, 이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하는 것에 대해서 상기시키고 싶은 것입니다.

기독교는 학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로써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언급해서 말씀 드리면 복음적인 신학자들의 학적인 연구가 불필요하며, 젊은이들이

세상의 문화에 물들어져 가는 것을 그저 방관하고 있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하는 것은 이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여서 기독교 학자들을 포함하여 - 그에 합당한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자면, 제가 말하는 학적인 면은 자신의 모든 우선순위를 학적인

것에만 두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 학적인 면이나 학적인 필요성을 채운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명에 최우선을 두고 열심히 연구하는 복음주의 신학교들의 교수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조직체에서 학적으로 명성 있고 자격이 있다고

인정받는 신학자들은 진정한 성경적인 학자들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학적인 면만 고려

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삶이 포함되는 것을 금지하는 추상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삶은 추상적인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기독교적 학문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근본적인 순종에 근거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하지 않으면 아무런 학문

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철저하게 제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주님의 지상명령에 참여한다

라는 것은 우리들 스스로가 더러운 손을 가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이 선교적인 마음을

가지고 학문성을 추구한다면 당신은 스스로를 전기나 물이 없이 오두막집에서 살아가며 땅을

파서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면서 살아간다는 곳에서 자신을 찾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교적

마음을 가지고 학문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화려하고 추상적인 미사여구로 꾸며진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그리스도께 헌신하며 어떠한 삶의 난관과 현실에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March 14, 2008

David Alan Black is the editor of www.daveblackonl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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